9
2
년
생
김
지
영
하나.
우리는
소진되었고
저는 단 한 명의 여성도
구하지 못할 거 같아요.
2019년 겨울, 여성 연예인 설리와 구하라 씨가 안타깝게 목숨을 끊었을 때 열린 추모제에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한 여성이 고백하듯 말했다. 그는 2015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을 통해 페미니즘을 알았다고 한다. 페미니즘은 마치 구원과도 같았다. 살면서 겪은 이상한 일들이 단순히 ‘내가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페미니즘을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속으로 삭혀왔던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 이것은 문제라고 힘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20대 초중반을 열정적인 페미니스트로 살았다. 거리서명에서부터 집회 참여, 댓글 달기, 페미니즘 관련 상품을 소비하기, 혜화역 시위와 낙태죄 폐지 시위 참여하기.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지쳤다고 느낀다.
“아무리 말을 해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는 말했다.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으니까. 저에게 방법은 두 가지 뿐이에요. 헬조선을 탈출하던가, 문제를 바꾸기 위해 높은 곳까지 올라가던가.”
한국을 뒤흔든
페미니즘 리부트
“넷상에서 여자들이 남자를 정말로 ‘꼼짝 못하게’ 했던 거의 최초의 시대였죠.”
여성활동가 반디가 메갈리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2015년 일베와 소라넷, 디씨인사이드 등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연달아 여성혐오 사건이 터지면서 여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시점에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메갈리아’가 탄생했다. 손희정 문화 평론가는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과 2015년 일어난 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과 접속의 지점을 포착’하기 위해 이 시점의 여성운동을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흥분됐어요. 제 생애 그렇게 통쾌한 순간은 처음이었거든요. 메갈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집단 ’직관’이 만들어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여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약자로서의’ 직관과 논리성이 결집되는 광경은 장엄하고 흥미로웠어요. 흠집 내기 어려운 에너지였죠. 저는 살아생전 그렇게 외연이 빠르게 확장되는 논리전개를 처음 봤어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만연한 여성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2016년 강남역 여성 표적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여성혐오'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의 글귀가 적힌 수많은 포스트잇이 붙었고,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2018년에는 디지털 성폭력에 대응을 촉구하는 혜화역 시위가 열렸다. 첫 집회 주최 측 추산 1만 5000여 명에서 12월 22일 전체 참여자 수 30만 명을 넘긴 한국 여성운동사상 최대규모의 시위였다. 2019년에는 일명 ‘썬학장’이라고 불리는 버닝썬, 김학의, 장자연 사건이 뜨거운 감자였다.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법적 판단 기준을 만들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했는데 여기에 여성들의 공이 컸다.
여성들의 번아웃과
자살율 증가
최근 한국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잇따라 번아웃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트위터 유저의 “많은 페미니스트 활동가 친구들도 ‘탈페미’하거나 번아웃을 호소하고 있다”는 트윗은 많은 리트윗과 공감을 얻었다. 유명 페미니스트 유튜버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외줄이 마침내 끊어졌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 A씨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스트 친구들끼리
자주 쓰는 표현중에
“불타서 재만 남았다.”
“재가 흩날린다”
이런 표현 많이 써요.
지쳐서.
B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너무 많이 소진됐어요. 메갈 시기와 많이 비교하게 되는데, 그때에는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여성이 많았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명 한명씩 다 떠나서 이야기를 하는 여자가 안남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들이 모여서 이전에는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면 신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정치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지치니까.”
여성들의 우울은 통계로도 드러난다. 2020년 국정감사에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여파로 우울감을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20대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어 여가부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2019년 2030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전년도 대비 6.7% 증가했다. 특히 20대에서 25.5%나 늘었고 30대에서 9.3%, 10대에서 8.8% 증가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0월부터 자살 사망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보아,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일부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2019-2020 20대 여성 자살자수
그러나 2020년에 들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신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2019~2020년 상반기까지 자살자 수 현황’에 의하면 20대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2019년 상반기 207명에서 2020년 상반기 296명으로 43% 급증했다. 20대 여성의 자살이 늘어난 주요 원인은 ‘코로나 블루(Corona Blue)’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하는,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다. 그러나 젊은 여성의 자살 증가를 코로나19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코로나19 확산 이전부터 20대 여성의 자살 사망자 수는 급증하는 추세였기 때문였다.
우려스러운 연구 결과는 예전부터 포착되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올해 연구한 청년 관점의 ‘젠더 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적 대응 방안 연구조사를 살펴보면 청년의 삶의 불안 지수는 상당히 높다. 구직, 낙오, 미래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불안이 기성세대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에 성별간 차이를 보면 청년 세대 중에서도 여성의 불안은 더 크다. 구직, 낙오, 미래 불안도 또래 남성보다 높지만 범죄피해 불안은 월등히 높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일상 속 불평등과 폭력이 코로나로 인해 증폭되면서 여성들의 극단적 선택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여성 자살 사망자 수 증가 문제의 적확한 근본 원인을 제시하기에는 여성 자살 사망자 수 급증이 나타난 게 고작 2년 남짓에 불과해 관련 통계 자료나 연구가 아직 부족하다.
대신 여성신문은 약 3개월에 걸쳐 우리 시대 지영이들을 만났다. 82년생, 92년생, 00년생 지영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성 ‘번아웃’과 우울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자살과 우울의 이유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전체를 덮고 있는 불평등과 백래시를 지목하고자 한다. 자산불평등, 불안정노동 등의 사회적 문제는 소수자에게 더 가혹하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성들이 힘을 모아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이것을 막으려는 흐름을 마주쳐야 했다. 백래시는 ‘젠더갈등’이나 ‘여성우월주의’ 등의 이름으로 상황에 따라 거죽을 바꿔 쓰며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일상 속 싸움을 막고 있다. 여성들뿐 아니라 ‘90년생 김지훈’의 이야기도 들었다. 지훈이들이 갖고 있는 ‘군대, 여성전용공간, 할당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들여다봤다.
여성신문은 2020년 기획기사 <92년생 김지영>을 통해 이 시대 여성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이 기획이 ‘페미니스트로 살기 힘들다’는 00년생 지영이들에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는 92년생 지영이들에게 조그만 용기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둘.
여전히
시달리며
3월 ‘n번방 사건’이 우리 사회를 흔들었다. 디지털 성착취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수많은 여성들의 공로였지만 이들은 누구도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추적단 불꽃’과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ReSet)’ 등은 단 한 명도 자신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이름이 드러났을 때 겪을 수 있는 n번방 가해자들의 보복이 주요한 이유기도 했지만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낸 것만으로도 겪어야 할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과 협박이 두려웠던 것도 있다. 20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신상정보가 드러나는 것은 생존이 달린 문제에 가깝다.
00년생 ‘김지영’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백래시를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처음 가진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이었던 세대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발달한 SNS는 여성주의 담론이 빠르게 발달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00년생 ‘김지영’이 폭력을 경험하는 공간이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익명’뿐이다.
온라인상에서의 괴롭힘을 뜻하는 ‘사이버 불링’은 1020세대 전반이 경험하는 문제다. 2018년 한국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초중고생의 29.2%는 사이버 불링 가해경험이 있고 30.3%는 피해 경험이 있다.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과 페이스북 ‘○○대학교 대나무숲’에서의 폭력, 혐오 표현은 실제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시위와 캠페인에 나서게 할 정도다.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는 3개월간 20여 개 대학의 에브리타임 내 혐오 표현을 수집한 결과를 7월 발표했다.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삭제되지 않은 550개의 혐오표현 게시물 중 47%는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에 대한 낙인과 비방이었다. 유니브페미 관계자는 “여성 이슈가 사회적으로 크게 떠오를 때 에타에서는 갑작스럽게 ‘여성단체는 이럴 때 가만히 있다’며 호명되고 대학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공론화하려는 움직임이 일면 페미니스트에 대한 욕설과 비방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문제는 온라인상의 혐오 표현과 폭력은 현실에서의 폭력과 위협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지난 3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총여학생회실을 강제 점거함으로써 수도권 대학 마지막 총여학생회를 없앴다. 2000년대부터 차차 없어지기 시작한 총여학생회는 2018년 급물살을 타 서울에서만 12곳이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대부분 학교의 총여학생회의 구성원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폭력을 경험했다. 유자 연세대학교 전 총여학생회 일상문화국장은 “총여라는 게 알려지면 학교를 마음대로 못 돌아다녔다”며 “사진이 찍혀 에타에 올라가고 ‘총여실 불 켜져 있다’며 글과 사진이 함께 게시된다. 실질적인 개인의 위협, 폭력이었고 언어적 폭력은 더 컸다”고 말했다.
범죄로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다. 지난 2월 ‘박사’ 조주빈(24)은 실제로 ‘박사방’에 잠입해 이들을 고발하고자 했던 20대 대학생 B씨의 신상정보를 캐낸 뒤 그를 향해 사이버 불링을 무료회원 등에게 지시했으며 실질적인 위협까지 가했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에서의 폭력이 경계 없이 오가는 동안 00년생 ‘김지영’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으로 ‘익명성’을 선택했다. 이들의 공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2018년 ‘불편한 용기’ 시위와 그 후 이어진 여러 여성 시위다. 이른바 ‘익명의 여성들’에 의한 시위는 얼굴을 마스크 등으로 가리고 누구의 이름도 남기지 않았다. 때로는 취재진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규칙을 적용해 촬영을 제한했다. 시위 후 있었던 여러 프로젝트들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9월 6일까지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걸렸던 ‘웰컴투비디오(W2V)’ 운영자 손정우(24)의 미국 송환 불허를 비판하는 광고를 걸었던 단체 ‘케도아웃(KEDO OUT)’도 20대 여성들이 주축이 돼 온라인을 통해 모였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실제 구성원의 정체 등은 전혀 알리지 않았다.
‘불편한 용기’ 시위를 비롯해 지난해 5월과 7월에 열린 ‘강간카르텔 유착수사 규탄시위’에 참가한 A(24)씨는 20대 페미니스트들이 익명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A씨는 “얼굴과 이름이 드러나는 건 남자들에게 칼 들고 찾아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나는 페미니스트지만 동시에 평범한 20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얼굴과 이름이 드러나는 건
남자들에게 칼 들고 찾아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나는 페미니스트지만
동시에 평범한
20대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00년생 ‘김지영’들은 적극적으로 여성인 자신이 경험한 반여성주의적인 폭력에 맞서 싸운 세대라고 평가한다. 총여학생회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학교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성폭력을 고발하며 이를 ‘스쿨미투’로 명명했으며 10만 명이 운집하는 거대 여성의제 시위를 성공시켰다. 이들의 성공에는 온라인이 있다.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온라인 공간은 폭발적으로 페미니즘 의제를 퍼뜨리며 전국 동시다발적인 행동에 돌입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이들 이 마주하는 백래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00년생 ‘김지영’으로 말할 수 있는 1020세대의 특징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스마트폰을 이용한 폭력을 초중고 시절 경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윤김 교수는 “학교에서 남학생이 여학생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원하지 않는 ‘엽사’를 촬영하거나 욕설을 SNS에 올리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을 경험하고 자란 세대”라며 “앞선 다른 세대들이 온·오프라인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들 세대는 온·오프라인의 구분이 희박하고 그것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크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익명’을 선택하는 것은 1020세대가 다른 세대와 동등한 발언권을 얻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라고도 말했다. 윤김 교수는 “익명성은 사이버 불링으로부터의 자기 보호기도 하지만 나이, 학력, 지역에 따른 구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발언권을 얻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 세대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고 지위를 획득한 후에는 익명에서 벗어나 오프라인 공간으로 실명을 걸고 편입하며 새로운 형태의 활동에 나설 테지만 현재 시점에서의 3040세대와는 또 분명히 다를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셋. 싸워야만 한다
이초록(31) 씨의 집은 지나가는 차 소리가 크게 들리는 대로를 끼고 있다. 창문을 닫아도 큰 차가 연달아 지나면 소음이 심하다. 이사 가지 않는 데에는 경제적 문제와 함께 안전 문제가 있다. 이 씨는 “20대 때 소라넷의 ‘몰카’ 게시글을 신고하는 등 노력했는데 30대가 된 지금도 안전을 걱정하고 살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90년생 ‘김지영’들의 삶이 위태롭다. 2015년 메갈리아,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여성혐오 살인과 디지털 성범죄를 똑똑히 목격했던 이들은 사회에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을 일으킨 세대다. 그러나 이들은 생존의 위험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2015년 메르스 사태 중 여성혐오를 일삼는 일부 남성 누리꾼에 대항하며 등장한 여성주의 사이트 메갈리아는 불법촬영과 성착취물 사이트 소라넷을 우리 사회에 공론화하는 데 성공했다. 수많은 범죄 중 불법촬영이 이들의 눈에 포착된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의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공적 장소에서의 안전까지 보장받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우리 사회가 불안하다" 응답 비율
‘90년생 김지영’들의 삶은 2015년 메갈리아 이후로 안전해졌을까? 이들은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발간한 ‘2018년 서울시 성인지 통계’에 따르면 서울 거주 여성 중 50.3%는 우리 사회가 불안하다고 느꼈다. 특히 2030 여성들의 불안감이 높았다. 20대는 63.0%, 30대는 59.3%가 불안하다고 답했다. 불안은 근거 없는 게 아니다. 실제 서울지방경찰청의 강력범죄 유형별 피해자의 90%는 여성이다. 성폭력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은 매년 90%를 웃돌며 이 중 70%는 30세 이하 여성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성범죄인 강간, 강제 추행, 성희롱 등과 더불어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인한 디지털 성범죄도 이들의 불안을 부채질한다. 지난 3월 ‘박사’ 조주빈(24)의 검거 직후 청와대 국민동의 청원은 사상 최대의 동의 수를 연달아 갱신했다. 청와대 국민동의 청원에 올라온 n번방과 관련한 4개 청원은 모두 합쳐 600만여 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며 사상 최대 동의 수를 기록했다.
범죄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벌이는 90년생 김지영들의 노력은 끝이 없다. 이루리(29) 씨는 말한다.
'집에 들어가면 카톡해'라는 말을
안 들어본 여자가 없을 거다.
친구들과 자취방 문단속을 위해
육각 열쇠나 창문 보조잠금 같은 물건을 공유하고
혹시나 불법촬영 사진이 있을까봐
남자친구의 사진첩을 구경하는 척 보다 보면
너무 허탈한 기분이 든다.
2030대 여성들이 지출하는 ‘안전비용’의 대부분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지만 가장 극심한 고용불안을 겪는 것도 이들이다. 코로나19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이 2030대 여성이다.
2019-2020 취업자 수(단위: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통계청 자료를 바탕으로 15세 이상 인구를 분석한 2020년 9월 여성고용 동향에 따르면 여성 취업자 수는 1158만 2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186만 5000명) 대비 2.4%(28만 3000명) 줄었다. 남성 취업자 수가 같은 기간 1553만 9000명에서 1543만 명으로 0.7%(10만 9000명)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감소폭이 3배 이상이다. 지난달 여성 실업률은 3.4%로 전년 같은 달에 비해 0.6%포인트 상승했다. 반면 남성 실업률은 3.7%로 전년 동월 대비 0.3%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여성 실업률은 20대가 7.6%로 가장 높았고, 15~19세 4.6%, 30대 3.6% 순이다.
2018년 임금근로일자리 평균 소득(단위:만)
코로나19 이전엔 나았을까? 그렇지 않다. 통계청이 1월 발표한 ‘2018년 임금근로일자리 소득 결과’에 따르면 남성의 평균 소득은 347만 원으로 여성(225만 원)보다 1.5배 많다. 연령대별 남녀 평균 소득 차이는 50대가 196만 원으로 가장 컸다. 이어 40대 160만 원, 60세 이상 122만 원, 30대 70만 원, 20대 17만 원에 달한다. 이는 남녀간 평균 근속기간이 1.6년 차이 나는 데서 기인한다.
결국 고용불안과 저소득은 주거비 부담을 가중시키며 빈곤으로 빠져들게 한다. 안전비용을 포기하면 범죄에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한국도시연구소가 2018년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여성 1인 임차가구의 가처분소득 대비 주거비(월 임대료 및 관리비에 전·월세보증금 전환비 6%를 더한 값) 비율은 31.9%로 전체 가구 평균인 10.2%의 3.1배로 나타났다. 남성 1인 임차가구의 22.1%와 비교해도 44% 높은 수준이다. 만 20~34세 청년세대 여성의 월세 거주율은 20.3%에 달한다.
강주영(33) 씨는 “청약이나 임대주택이 되면 좋겠지만 결혼하지 않은 나에게 그건 꿈같은 이야기”라며 “신림동 주거침입 사건이나 불법 촬영 사건을 접할 때면 사회가 여성의 안전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구청이 지난 여름에 보조키와 문열림 센서, 긴급 비상벨을 주기는 했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넷.
현실은
열악한데
진짜 '김지영'은 더욱 고달팠다
80만 6000명(통계청 2019 ‘경력단절여성 현황’). 결혼한 30대 여성 중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숫자다. 그중에 한 명이 ‘김지영’이다. ‘82년생 김지영’은 한 평범한 여성이 가족, 친구, 사회로부터 겪는 일상의 차별의 실상을 담은 책이다. ‘맘충’이라 불리는 김지영 씨는 출산과 함께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이른바 ‘경력단절 여성’이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된 이유는 수많은 ‘김지영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 정도면
‘순한 맛’ 같아요.
누가 더 힘들다고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책 속에서 김지영이 겪은
작은 성차별 정도는
너무 흔했거든요.
"초등학교 때 남학생은 앞번호, 여학생은 뒷번호가 당연했죠. 남동생 밥은 제가 차려줘야 했어요. 학교 앞 바바리맨에 대처하는 법을 친구들끼리 공유하고 지하철에서 성추행 아저씨도 몇 번 만나봤죠. 성희롱도 숱하게 당했고요. 그래도 김지영은 공무원 부모 밑에서 알바 한 번 안하고 학비 걱정도 없이 졸업했고, 곧바로 정규직으로 취업해 결혼도 대기업 다니는 남자와 무난하게 했잖아요. 대학 때 알바하고 취업해선 학자금 대출 갚고 결혼해선 남편 월급 쪼개 사는 제 주변 여자들은 오히려 현실은 ‘매운 맛’이라고들 해요.”
1981년 3월생인 전업주부 이선희(가명) 씨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드러낸 동년배 평범한 여성의 삶에 공감하면서도 ‘진짜’ 현실은 더 고된 것 같다고 했다. 먼지 같은 일상의 차별은 지속됐지만 다행히 이전 세대에 비해 교육기회의 차별은 사라진 1990~200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김지영들’은 고학력으로 희망을 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는 3명 중 1명이 ‘일’을 포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 결혼한 30대 여성 3명 중 1명(31%)은 경력단절 여성이다. 이 여성들의 42.0%가 직장을 그만둔 이유로 ‘육아’를 꼽았다. 27.6%는 결혼 때문에, 26.9%는 임신과 출산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제도가 확대되고 맞벌이를 선호하면서 임신·출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이들이 줄어든 반면, 육아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직장을 포기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통계청은 설명했다.
출산과 육아가 아니라 열악한 근무환경 때문
그런데 또 다른 ‘김지영’ 김선영(가명) 씨는 결혼이나 임신은 퇴사의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고 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 곳에 제 미래가
안 보인다는 거였어요.
회사를 5년 넘게 다녔는데
남자 동기가 먼저
대리, 과장 직함을 달았고요.
“오물이 무서워서 피하진 않잖아요. 더러워서 피하지. 직원 100명 정도 되는 탄탄한 중소기업에 다녔어요. 수십 군데 이력서를 넣다가 어렵게 들어간 곳인데, 사표 내기까지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곳에서 제 미래가 안 보인다는 거였어요. 회사를 5년 넘게 다녔는데 남자 동기가 먼저 대리, 과장 직함을 달았고요. 상사들도 다 남자였는데 남직원들을 대놓고 챙겼어요. 성희롱하는 상사들도 있었고요. 답답한 건 그게 문제라는 생각조차 안 하는 회사문화였어요. 저도 입사할 때는 직장문화라고만 생각해서 넘겼는데 그런 말과 행동이 점점 불편해지고 화가 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서 정색하면 저만 이상한 사람이 돼버리니 입을 닫게 됐어요. 승진도 이직도 어렵다면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오히려 더 확실한 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실제로 2014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서 20~60대 비취업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장을 그만둔 이유로 ‘근로조건 및 직장환경’을 꼽는 응답자가 184명(23.6%)으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계약만료(19.6%)’, ‘결혼·임신·출산 시 퇴사 관행(13.7%)’ 순이었다. 결혼·출산·육아가 여성이 경력단절을 겪는 주된 요인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근로조건 등 일자리의 질이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김 과장’으로 불리던 김선영 씨는 이제 동네에서 ‘OO 엄마’로 불린다. 지난 2년 동안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산 그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쯤엔 다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것도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남편 뒷바라지만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도 하고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더 이상 취업 시장에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다.
1인 가구 수입만으로는
불안정한 노후
결혼 제도 밖 ‘김지영들’의 현실도 녹록치 않다. 80년생 최세연(가명) 씨는 1인 가구로 산 지 6년이 넘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이직하면서 월세로 살다, 작년부터 전세살이 중이다. “서울 하늘 아래 내 집 갖기”가 소원이라는 그는 “비혼 여성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에 예전엔 짜증이 났지만 요즘은 신경도 안 쓴다”고 했다. 최세연 씨가 요즘 가장 관심 갖는 것은 ‘돈’이다. 결혼 생각이 없기 때문에 홀로 노후준비를 하려면 지금 받는 250만 원의 월급으로는 빠듯하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나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에요’라는
한 여성 점원의 말이
마음에 남더라고요.
“알바를 구하러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온 김지영에게 이렇게 말하는데 책 속 김지영처럼 저도 울컥했어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알바가 정직원이 될 수도 없고 시급은 최저임금에 간신히 맞춰서 받는 일자리. 지금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하지만 제 또래 여자 직원은 손에 꼽고 대부분 결혼했어요. 저는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다음 달 관리비, 카드값 걱정부터 해야 해요. 재테크 책모임에 나가고 경제 유튜브 보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어떻게 해야 돈을 많이 벌고 노후 걱정을 덜 수 있을지 걱정이 커요.”
여전히,
수많은 '김지영'들
올해 여성 국회의원(57명)이 역대 최대 규모로 국회에 입성했고 여성 장관(6명) 비율도 30%에 다가섰다. 상황이 나아졌다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수많은 ‘김지영’들이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여성 고용률은 51.6%로 10년 전(47.8%)보다 3.8%포인트 올랐다. 그러나 남성 고용률 70.7%와 비교하면 19.1%포인트 차이가 난다.
1인 이상 사업체 임금근로자 시급
고용지위도 불안정하다. 지난해 상용근로자 비중은 여성(48.7%)이 남성(55.2%)보다 6.5%포인트 낮았다. 반대로 임시노동자 비중은 여성(24.9%)이 남성(12.1%)보다 12.8%포인트 높았다. 여성고용률은 경력단절 영향으로 전 연령대 중 30대에서 일시적으로 하락하는 ‘M자형’ 추이를 보였다. 지난해 1인 이상 사업체 여성 임금근로자의 시간당 임금은 1만 6358원으로 전년(1만 5265원)보다 1093원 올랐지만, 남성(2만 3566원)의 69.4%뿐이었다. 남성 대비 여성근로자 임금비율은 2017년(65.9%), 2018년(67.8%)로 상승 추세지만 여전히 70%도 안 된다.
국민연금 가입자 중 여성은 45%(853만 2000명)로 남성(55%)보다 적었다. 남성보다 저임금인 데다 국민연금 가입률도 낮아 노후준비를 못 한 여성이 많았다. 지난해 ‘노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여성 비율은 40.4%로 남성(29.3%)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 응답 비율
노후 준비를 하지 않은 여성 가운데 41.5%는 ‘준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으며 앞으로 준비할 계획(32.1%), 아직 생각하고 있지 않다(14.6%), 자녀에게 의탁(11.7%) 순이었다.
다섯.
'지훈이'는
서럽댄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남성이기 때문에 역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생각한 남성 대학생은 62%였다. 또,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의 ‘새로운 세대의 의식과 태도 - 2030세대 젠더 및 사회의식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들은은 남성 차별 사례로 △여성할당제 △지하철·주차장 등 여성 전용 공간 같은 정책적·문화적 역차별 △군 복무 문제 등을 꼽았다. 이에 ‘90년생 지훈이’들의 구체적인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3명의 2030세대 남성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 남초 직장에서 근무
- 남중, 남고
- 올해 초 은행에서 인턴 시작
-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 있음
제시어:페미니즘
제시어:여성 징병제
제시어:여성할당제
제시어:미러링
여섯.
젠더 갈등
속에서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는 본인의 저서 ‘백래시’를 통해 미국 여성운동에 대한 전 사회적 반격의 흐름을 정리했다. 책을 통해 우리는 1980년대 미국의 경제 위기 속에서 언론과 학계, 문화 예술계 등이 반페미니즘적 주장을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수전 팔루디에 따르면 백래시는 “기반암처럼 단단하게 자리잡은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현대 여성들의 각별한 노력”이 있는 상황에서 촉발된다. 한국 반페미니즘 정서도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백래시 리부트됐다. 현재 한국에 주요하게 퍼져있는 반페미니즘적 주장은 아래와 같다.
페미니즘 = 워마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Feminism is For Everybody)저자인 여성학자 벨 훅스는 "보수적인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남성혐오자로 묘사했다. 페미니즘 운동 내에 반남성 분파나 그런 정서가 보인다 싶으면 페미니즘에 흠집을 내기 위해 대중매체는 그 사실을 집중조명했다” 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도 페미니즘 리부트 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우월주의자라는 흠집내기가 계속해 이어졌다.
2018년 래퍼 산이는 이수역 폭행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합동 콘서트 도중 콘서트 도중에 “페미니스트 No, 너넨 정신병”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해당 주장에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로 ‘워마드'다. 여성신문이 인터뷰 한 20대 남성 A씨는 워마드는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로 남성을 부정하는 여성우월주의자라고 표현한다.
워마드는 2015년 메갈리아 사이트 탄생 이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의견이 대립되어 파생된 온라인 사이트이다. 일부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혐오하고 과격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논리다.
이런 프레임은 불법촬영 편파수사 반대인 ‘혜화역 집회’로도 이어졌다. 2018년 1차부터 6차까지 한 해 동안 ‘불편한 용기’를 중심으로 수만 명의 여성들이 집회에 모였다. 1차, 2차 집회 때까지만 해도 여러 언론들과 인플로언서들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할 수 있다는 집회 규칙에 여러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언론계에서도 여성 기자와 촬영기사를 투입했고 동의 없는 촬영이 생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3차 집회인 7월 7일 이후 김어준 씨는 자신의 방송을 통해 집회에서 “문재인 재기해”라는 구호를 연창했다며 이는 자살을 뜻하는 것으로 “상대가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자살하라는 구호가 나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후 혜화역 집화와 ‘워마드’와의 관계설이 불거져 나왔다.
곧바로 워마드 사이트에 대한 기사도 줄이어 보도됐다. 2018년 8월 워마드 사이트에 ‘성체 모독’ 게시글이나, ‘낙태인증’ 게시글이 올라와 페미니스트들이 ‘도가 넘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1년 후 수사 결과 성체 모독 게시글을 작성한 이는 남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낙태인증 게시글은 구글에 검색만 하면 나오는 이미지를 퍼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제대로 바로 고쳐지지 않았고 ‘워마드=페미니스트=심각한 여성우월주의자’라는 부정적 인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은 약자가 아니다?
K-형 백래시의 근거로 자주 쓰이는 또 다른 논조는 여성의 소수자성을 부정하며 여성들이 젠더 불평등을 강조하는 것이 대결 구도를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아래는 여성신문이 인터뷰한 30대 남성의 대답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전방위적인 백래시가 일어날 때 미국은 ‘전통적인’ 남성의 실질임금이 급격히 줄어드는 시기를 겪고 있었다. 공장 폐쇄로 생산직 남성들이 수백만 명씩 일자리에서 쫓겨났고, 이 중 겨우 60%만이 임금이 절반 가까이 적은 새로운 일자리로 옮겨갔다. 젊은 베이비 붐 세대 남성들은 소득 저하의 직격탄을 받았는데, 평균적인 30세 이하의 남성들은 10년 전 같은 집단보다 30~35% 더 적은 소득을 받았다. 하락하는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과도한 집값에 대한 불안을 여성들이 야기한 것처럼 치부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82년 경제 연설에서 “직업 시장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고, 숙녀들, 뭐 난 아무도 불쾌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일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기 때문에 실업은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큰 침체는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남성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일자리에서 밀어낸 것은 여성들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팔루디는 “현실 속에서 경제적 고통은 남성이 아닌 여성들에게 지나치게 큰 피해를 강요했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이 계급 양극화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저임금 일자리에 내몰렸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도 유사한 백래시 흐름이 진행 중이다. 시사인의 ‘20대 남자 현상’ 여론조사에 따르면, ‘반 페미니즘 정서를 가진 신념형 20대 남자 집단’은 ‘업무 능력이 남성보다 더 뛰어난데도 양성평등이라는 이유로 국가 권력이 개입하여 불공정한 사태를 만든다’고 인식한다. 조사에 따르면 남성 중 반 페미니즘 정체성 집단 규모는 25.9%에 달했다.
이들은 여성이 소수자가 아니라고 인지한다. 교육이나 노동 조건에서 여성이 약자인 시절은 이미 지났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 여성할당제나 여성전용공간 등 정책을 펼치는 것이 역차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과거 행해졌던 여성 차별은 이해하는데 지금은 여성차별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여성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집단은 이기적인 집단일 수밖에 없다.
젠더갈등이 심각하다?
‘젠더갈등’이라는 프레이밍(Framing)은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보도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은 여성혐오”라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대해 일각에서는 “여성혐오가 아니라 정신병에 비롯된 사건”이라는 주장을 다루면서 “남녀 간 갈등이 심화된다”는 보도가 시작됐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2018년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관련해 ‘이영자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20대, 영남지역, 자영업자에서 많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후 ‘이영자’현상은 20대 남자만 뜻하는 ‘이남자’로 뜻이 바뀌어 사용된다.
지난 2019년 2월 문재인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는 “20대 여성이 페미니즘 등 집단이기주의 감성으로 무장하고, 남성 혐오 문화가 확산해 20대 남성 지지율이 하락했다”는 내용의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요인 분석 및 대응방안’ 내부 보고서를 제출했다. 해당 보고서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을 둘러싼 여러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20대 여성은 개인주의, 페미니즘 등의 가치로 무장한 새로운 ‘집단이기주의’ 감성의 진보집단으로 급부상한 반면, 20대 남성은 경제적 생존권과 실리주의를 우선시하면서 정치적 유동성이 강한 실용주의 집단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또 혜화역 집회 등과 관련해 ‘정치세력화된 여성집단’으로 표현하고, 20대 남성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이익이나 입장을 대변할 정치적 ‘우군’이 없다는 현실 인식이 팽배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주요 갈등 요소로 ‘젠더’ 문제가 부각됐으며 ‘여성혐오’와 ‘남성혐오’ 등 극단적인 대립의 성향을 가진 젊은 여성과 남성이 문제라는 문구가 청와대 보고서에 올랐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젠더 불평등한 현실을 직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여성의 목소리를 줄이는데도 한몫한다. ‘갈등’이 심화되면 사회 분열까지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화합을 위해 갈등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가 ‘예민한 페미니스트의 과다망상’처럼 들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계속해서 검열한다. 메갈리아에서 활동했던 반디는 페미니즘 리부트 시절 온라인 속에서 일어난 여성들의 에너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흥분됐어요.
제 생애 그렇게 통쾌한 순간은 처음이었거든요.
메갈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집단 ’직관’이 만들어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여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약자로서의’ 직관과
논리성이 결집되는 광경은 장엄하고 흥미로웠어요.
흠집 내기 어려운 에너지였죠.
저는 살아생전 그렇게 외연이 빠르게
확장되는 논리전개를 처음 봤어요.
그 당시 여성들의 ‘흠집 내기 어려운 에너지’는 백래시가 극심해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더는 재현하기 어려워졌다.
백래시가 극에 달해 여성의 목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부터 한국 사회의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증가하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2019~2020년 상반기까지 자살 현황’ 에 의하면 2019년 2030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전해에 비해 6.7% 증가했다. 특히 20대에서 25.5%나 늘었고 30대에서 9.3%, 10대에서 8.8% 증가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0월부터 자살 사망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보아,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일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20년에 들어서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20대 여성 자살 사망자 수는 2019년 상반기 207명에서 2020년 상반기 296명으로 43% 급증했다.
20대 여성 자살 사망자 수의 급증을 촉발한 주요 원인은 코로나 블루(Corona Blue)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하는,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다. 그러나 젊은 여성의 자살 증가를 이것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코로나19 확산 이전부터 20대 여성의 자살 사망자 수는 급증 추세였기 때문이다.
김봉수 성신여자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20·30대 여성 자살 증가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페미니즘으로 인해 정치적 발언권이 있는 여성은 득세하지만, 취약계층 여성은 더 열악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라면서 “세월이 흐르고 나면 여성을 위한 줄 알았던 페미니즘이 사실은 여성들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자살 증가 조차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처럼 페미니즘을 향한 전 사회적 백래시는 한국 여성들의 문제 제기를 무화시키며 여성의 문제를 ‘몰젠더화’ 시킨다. 그러나 앞선 기사에서 지영이들의 삶을 살펴보았던 것처럼 여성을 향한 폭력은 심각한 상황이고,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오히려 더 늘어났으며, 코로나19 시국에서 여성은 위기에 더욱 취약하다. 더욱 문제인 것은 젠더갈등을 야기시킨다는 백래시 프레임 속에서 여성들은 여성이기에 더 가혹한 구조적 불평등을 겪고 있으나 이에 대해 문제 제기도 하지 못하는 데 있다. 여성은 약자이면서도 약자가 아니고, 피해를 보면서도 피해를 본다고 말하면 안 되는 이중적 태도를 요구받는다. “페미니즘은 갈등을 만든다”는 켜켜히 쌓인 한국 백래시의 서사는 여성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일곱.
새로운 남성성을
요구한다
젠더 인식에 대한 2030세대의 성별 간 격차가 상당하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는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갈등’ 및 ‘노동조합’ 관련 인식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젠더 갈등은 20대 젊은 층(20대 62.4%, 30대 40.5%, 40대 21.9%, 50대 21.6%)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심각성도 많이 느끼는 분야였다.
여성신문은 ‘젠더 갈등’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자 지난 7월 8일 여성신문 회의실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는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박정훈 오마이뉴스 기자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연구위원이었다.
‘Aggrieved Entitlement’ 개념을 소개하고 싶다. 어떤 사회에서 한 기득권 집단에서 속한 사람이 기존의 사회적 전통이나 이전 세대들의 삶을 봤을 때 내가 이 정도는 당연히 누려야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데 현 시점에서 (그런 것들을) 느끼지 못할 때 느끼는 억울함, 허탈감을 뜻하는 특정한 단어다. 예를 들면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Black lives matter’을 보면 미국에서는 ‘인종’으로 드러난다면 한국은 ‘젠더’로 나타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가 느끼는 어떤 조율의 박탈감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타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깃은 당연히 엄청난 분석을 통해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딱 보이는 집단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피부색, 인종으로 드러나는데 한국에서는 성별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근 수년간 쌓아온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젠더 간의 이해를 막는 측면도 있고 지금 벌어지는 하나의 역차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공정성과 박탈감이라는 논의가 젠더 갈등과 계속 결합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자신들보다 여성이 조금 더 이득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론기사를 보면 ‘젠더갈등’이라는 단어는 남성들의 안티 페미 행위에 이 단어가 많이 쓰인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무언가를 바꾸자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막자고 한다. 갈등처럼 보이는 이유는 메갈리아 이후에 여성들이 이러한 투쟁언어를 얻어서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법부 죽어라’와 같은 강한 언어를 썼지만 과거의 남성들은 그러한 언어를 듣지 못했다.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약간의 거부감도 있다. 지금까지 자라면서 남성들은 프레임된 강한 언어, 남성 일반을 ‘나쁜 사람’ ‘범죄자’로 묘사하는 것들을 먼저 상상하게 되고 들으면서 반발이 커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기반하지 않으면 여성들이 조금 더 이득을 보고 있다고 보는 착각이라는 것이 있다.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됐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담론이 불거진 것은 2013년이다. 한국사회를 뒤덮었던 것이 ‘헬조선’이었다. 남녀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남성 언어로 이야기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디씨 문화에서 찌질한 남성성이 그렇게 적대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격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차별적으로 된 것은 이명박근혜 정권 때부터. 한국은 다양성이 없다. 기본적으로 다양성이 없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20대 남성의 반페미를 하게 되는 결정적 요소는 여성들이다. 20대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됐기 때문이다. 20대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해 정말로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남성들만 주목하고 여성들이 무언가를 했을 때는 언어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혐오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사건에서 트랜스젠더는 경쟁자가 되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트랜스젠더를 자신과 같은 약자가 아니라 배제하는 대상으로 보고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트랜스젠더가 침입자 카테고리로 인지되는 것이 안타깝다. 신의 생계, 미래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다른 전반에 깔린 실제 하는 차별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금 너무나 저성장 사회이고 경제성장이 느려지고 있어서, 취업 연령이 높아지고 생계의 문제로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논리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분들이 경쟁 대상으로 보는 것이 어느 정도 있다. 숙대 여성혐오랑 굉장히 유사하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기본적으로 불법촬영 등 남성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불신이 있는 상태다. 소수자이기 전에 나를 위협하는 존재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성보다 트랜스젠더를 더욱 심하게 욕하기도 한다. 그 이유가 첫째는 교란자이고 두 번째는 혐오다. 이미 사회가 깔아놓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도 있다고 본다.
트랜스젠더의 여성관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결코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메갈에서 워마드로 오면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핵심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이들이 많이 언어화 됐으면 좋겠다. 이들의 대변자나 문화인류학자도 없다. 이들이 어떤 경로로 페미니스트가 되고 있는지 논쟁도 하며 기회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실은 여성혐오적 구조, 성차별적 구조, 불평등한 환경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이런 맥락에서 남성들이 ‘모든 남성들이 그런 것이 아니야’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러한 말을 하면서 중립을 지키려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구조를 이대로 유지하는데 공모하겠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 상황에 직접 개입하면 된다.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처럼 지적하는 사람을 옆에 둬야 한다. 이미 있다면 감사한 것이고. 그런 사람들 계속 옆에 둘 것 그리고 불편함을 계속 견디고 들을 것을 권고하고 싶다.
첫째는 요즘에는 유튜브에 혐오 콘텐츠가 많은데 철구가 남성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성인 남성을 이렇게 바라보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들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성평등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남성에게 끊임없이 요구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맨박스가 굉장히 좋았던 것은 남성에게 ‘무엇을 해라’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지만 ‘너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길 때 막아라, 지적하라’라고 하면 알아 듣는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청원이라도 하고 SNS에 올리고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 실제로 조직에서 무언가를 깨고 주변을 바꿔나가는 사람들, 즉 남성 롤모델이 주목받았으면 좋겠다.
젊은 남성들을 생각했을 때 제일 속상한 것은 구의역 사건과 같은 산재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노동현장에서의 안전 문제는 물론 여성에게도 해당되지만 건설 관련 문제는 남성성의 착취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이래야 해’라고 굴종하는 모습이 남성화된 모습이다. 권위주의적인 노동문화가 취약한 남성 문화를 더욱 취약하게 하고 있다. 지금의 산재 문제는 남성의 문제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남성의 피해자성이 건강하게 나오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성의 착취에 기반한 노동문제를 남성의 문제로 호명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적인 무엇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덟.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아직 차마 다 듣지 못한 지영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고루한 신세 한탄처럼, 술자리 술안주처럼 귓등 너머로 지나가는 이들의 사연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찐득한 젠더 갈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치부돼 지워지는 지영이들의 목소리 중 일부를 담았다.
아직은 요원한 꿈이지만 구구절절한 지영이들의 이야기들이 더는 공감되지 않기를 바란다. 82년생, 92년생, 00년생 지영이들이 훗날 “나 때는 말이야”라며 유쾌하게 미래의 딸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번아웃이 밀려올 때
번아웃.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약 9개월 정도 되었을 때 '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너무 힘들다'라고 확실히 느낀 것 같아요.
저는 그때가 직장생활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말을 들어도 견뎠어요. 이런 게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이라는 건줄 알았거든요. 여기에 내가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하면, 하하 웃으면서 넘기지 못하면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느꼈어요. 저는 그래서 계속 웃고, 나쁜 말을 들어도 웃어넘기거나 모른 척 하고, 일에만 집중어요. 칭찬을 받을 정도로 능률은 좋았지만, 반면 저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어요.
그러다 펑 터져버렸어요. 계속해서 저의 노력은 모두 무시하는 발언들과 취급이 있었거든요.
"그런 거 할 시간에 청소나 잘 해라."
"지금 그거 연습할 때야?”
“너 그거 할 정도는 아니잖아. 저거나 치워. 설마 나 하라고 내버려 둔거냐?"
회사에서는 제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시키곤 했죠. 직원 둘이 싸워서 한 명이 갑자기 그만뒀는데, 바로 저보고 그 일도 대신 맡아서 하라고 하던지, 야근을 하거나 쉬는날 나와서 일을 처리하고, 그렇게라도 안하면 다시 따로 불러서 혼내기 일쑤였고요.
성차별적인 발언도 너무 많이 들었어요.
"여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화장 안할 거야?"
"안경 쓰네. 렌즈 안 쓸 거야?"
"옷 좀 예쁜 거 입어. & 오늘 옷 예쁘네. 남자친구 만나나봐, 응?"
“여잔데 뭐하러 힘을 써.”
“힘이 왜 이렇게 쎄? 운동? 운동을 뭐하러 해, 징그럽게. 운동 코치라도 될 거야? 요가같은 건 안해?”
지긋지긋한 성희롱 발언들.
"남친 안만들 거야? 너 그러다가 결혼하기 전까지 성관계 못해봐. ㅇㅇ님도(자리에 없던 다른 여자 직원) 지금 남편이 첫 관계 상대잖아.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젊은데."
"어깨가 작아서 그런가, 이렇게 잡는 느낌이 되게 좋다. 지켜주고 싶어."
그리고 말도 안되는 트집들, 회식에 꼭 참여하라고 눈치를 준다거나, 참여하면 꼭 가장 높으신 분 옆에 앉게 한다거나, 갑자기 건배사를 하라고 해놓고 무슨 말을 꺼내면 그게 뭐냐고 대놓고 트집을 잡거나, 뭔가를 하라 해놓고 하고 있으면 나 자야되는데 시끄럽다고, 재료낭비 하지 말라고 혼낸다거나. 뜬금없이 너같은 애는 몇대 패야한다고 말한다거나. 자기들한테 살갑게 대하거나 인사하지 않으니 이상한 애라거나 싸가지 없다는 말들.
어느 순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거기까진 괜찮았어요. 거기까진 터지긴 했어도 번아웃이 올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번아웃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론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그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리듯 와버렸어요.
이미 저런 나쁜 말들을 하는 게 사회의 분위기였고, 다들 나이가 나보다 열 살, 많게는 스무살 이상은 많있기 때문에 저는 함부로 말도 꺼낼 수 없었어요. 저 혼자서는 그 큰 벽들에 도전 할 기회조차 없었어요.
제가 일이라도 더 잘하면 덜하겠지 싶어 누구보다 빨리 가고, 모두의 편의를 위해 최대한으로 노력해 봤지만, 평도 굉장히 좋아졌지만 그때뿐이었어요. 이미 저는 그런 일적인 것 외로 말도 안 되는 욕을 먹고 하등한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일을 잘해도, 일을 다니며 아무와도 싸운 적 없어도, 인사 잘하고 하하호호 잘 웃어도 기어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을 파고들거나 꾸며내어 나를 까내려갈때, 날 인정해주지 않을 때, 그걸 제가 정확히 인지했을 때 쌓이고 쌓인 것들이 결국 터져버렸어요. 99도까지 올라갔던 것이 100도가 되어버린 느낌.
가끔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가볍게 "아 죽고 싶다~" 라는 말을 내뱉었던 것과는 다르게 저는 진심으로 죽음을 원했어요. 그런데 자살을 할 의지조차도 없었어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어요. 제 주제에 뭔가를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겁쟁이가 되어서 '누가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 '그냥 출근하는 길에 차에 치이거나 내가 탄 버스가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매시간 했어요. 갑자기 건물에 폭발이 일어나서 여기서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요. 저는 어떻게든 수동적 죽음을 바라고 있었어요. 사실 죽음이라기보단 회피에 가까웠겠지만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친구들과의 만남도 모두 미루고 또 미뤘고, 같이 살고 있던 엄마와의 대화도 줄었죠.
잠도 자기가 싫었어요. 내일이 오는 게 너무 끔찍해서 새벽에 토한 적도 많았어요. 밥도 전혀 안먹고 직장에서 다 같이 가야하는 시간에만 한 끼 찔끔 먹은 게 다였죠. 그래도 배고픈 걸 못 느꼈어요. 이러다 내가 영양실조가 걸린다거나 병에 걸려서 최소한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을 바라기도 한 것 같아요.
눈물도 많아져서 별 것도 아닌 일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남들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죠. (이건 “왜 대화할 때 감히 싸가지 없이 눈을 마주치냐”며 부모님뻘 상사한테 혼난 탓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신기하게 사표를 쓰겠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어떻게든 더 이상 욕먹기가 싫었죠. 내가 그만두면 누군가를 뽑아야하기 때문에 귀찮아하시겠지, 이런 생각으로 멍청할 만큼 꾸역꾸역 버텼죠.
차라리 내가 일을 너무 못하거나 누군가와 크게 싸워서 잘라줬으면 싶었어요. 그만큼 난 남 눈치나 보고 뭐 하나도, 심지어 부정적인 것조차도 능동적이지 못한 인간이 되어버렸죠.
너무 빠른 시간 만에 망가져 버린 거에요. 손톱과 그 주위도 자주 물어뜯게 됐는데 다음날 이 상처를 보고 또 무슨 소리들을 들을까봐 무서워서 운적도 있어요. 정말 많이 나약해져버린 것이죠.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9개월 정도 되던 날, 밤을 새면서 멍때리다 울다를 반복하다 확실히 느꼈어요.
“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너무 힘들다. 내가 너무 약해졌고, 뭐가 옳고 그른지 구분도 못하고, 내 성과에 대해 인정도 못 받고 있다. 이건 정말 비정상적인 상황이자 상태인 거다.”
그것이 내가 번아웃을 제대로, 그리고 확실하게 인식한 시점이죠.
유리멘탈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지만 번아웃 경험이 상당히 많아요.
사회 초년생 시절, 일을 하다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전무님이었는데 곧 자기의 지인이 가니 커피를 내려서 대접을 하고 있어라는 내용이었죠. 회사와 관련있는 분들도 아니고 본인의 지인을 내가 응대할 이유가 없으니 못 하겠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어요. 또 바리스타분들도 휴무라고 말했죠.
그러나 전무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가 대학생 때 카페 아르바이트도 안 해봤냐, 그 나이 먹고도 커피 하나 내릴줄 모르냐며 수화기가 찢어질 듯이 고함을 질러대며 인신공격을 했어요.
결국 난 커피를 내리며 응대했고, 그 후 시간이 지나도 고함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내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내가 직장 상사 친구들까지 응대를 해야하나 하며 업무 관련 번아웃을 느꼈죠.
(단순히 커피믹스가 아닌 사무실 맞은편 연계된 카페가 있었어요. 바리스타분도 휴무여서 내가 직접 카페 오픈을 하고 커피를 추출했다. 내 업무에는 바리스타 업무가 있지 않았죠.)
회사에 나와 같은 년차의 남자 직원이 있었어요. 그 남자 직원의 직급은 '대리'였고, 난 '사원'이었죠. 회사 상사와 면담을 할 때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나와 같은 년차인데 직급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내가 입사하기 전 승진시험을 치뤘다던가 전문 자격증이 있다던가 그런 류의 대답을 예상했지만 보기좋게 빗나갔죠.
상사는 나에게 "쟤는 남자니까 군대를 2년 다녀오는데, 어떻게 너랑 같냐"는 대답을 받았어요. 아무리 내가 열심히 해도 이렇게 처음부터 차별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고 허탈함을 느꼈죠.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께 당연히 애교를 부려야 한다는 편견 속에 살았어요. 부모님은 여자애가 왜 그리 무뚝뚝하냐며 속상하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셨죠. 대신 난 애교는 없지만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무렵부터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고, 용돈이 아니더라도 기념일날 팔찌, 귀걸이 등 선물하며 어디 모임에 나가서도 기죽지 말라고 틈틈히 챙겼어요. 엄마는 내가 선물한 팔찌, 귀걸이를 그대로 자신의 첫째 딸, 장녀에게 고스란히 선물했죠.
한번은 아는 지인이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며 고향 특산품을 택배로 보내줬었어요. 부모님과 다같이 먹고 며칠 지나고 또 먹으려 하니 없었어요. 부모님은 너가 다 먹었버렸지 않냐고 하나도 없다고 했지만 냉동고 구석에 숨겨져 있는 걸 발견했어요. 자신의 아들에게 먹일려고 숨겨놓은 것 이었죠. 부모님은 오히려 나에게 "욕심 많은 년", "너 혼자 다 꾸역꾸역 쳐먹을려고?" 하고 소리를 질렀죠.
내가 아무리 용돈과 반짝거리는 악세사리를 선물하고 여행도 보내드리며 살갑게 대해도 난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가족관계에서도 번아웃을 느낄 수 있구나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4대보험도, 고용안정의 보장도 없는 방송국 프리랜서에요. 평일 오전 9시 부터 오후 6시까지 사무실에 상주하는 '상근 프리랜서'. 이름부터 웃기죠. 하지만 국장이라는 사람은 이런 체제에 대해서 이해도가 정말 낮아요. 저는 계약서에 명시된 일을 매일매일 성실하게 다 했어요. 그런데도 저에게 일을 왜 이따위로 하냐고 하죠. 니 일 내 일 나눠가면서 하면 안 된다고, 다른 사람 일도 도와주라고 해요. 프리랜서 할머니도 이렇게 일 안한다고.
“최저시급을 받아가며, 근근이 월세를 내고 살면서, 남의 일까지 도맡고 싶지 않습니다.”
참다참다 한마디 해 봤자 돌아오는 말은, "그럼 넌 왜 여기서 일하냐?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저라고 계속 있고 싶어서 있겠나요. 서울 소재의 4년제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없는 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시기를 잘 타 높은 자리에 올라간 당신같은 사람에게 야 야 반말소리 들어가며 일하는 곳, 저도 때려치우고 싶죠.
주말엔 외주를 해요. 프리랜서는 외주로 먹고 사니까요. 이렇게 매일 일하고, 집에 들어가서 고양이를 끌어안고 있자면 눈물이 흘러요. 너희랑 행복하게 사는 게 내 꿈인데, 같이 '살아'보려고, 돈 버느라 정작 너희를 잘 보지도 못하네, 하면서 울죠. 매일매일이 번아웃이에요.
번아웃에 대처하는 법
너무 참지 말라! 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면서도 정말 어려운 말이에요. 나도 번아웃을 겪기 전에 이 비슷한 상황들을 들으면 “참지말고 뭐라고 해버려!”라는 말을 했겠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게 참 어려운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죠.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내 탓 하지 말자’에요. 스스로를 너무 죄인 취급할 필요가 없어요. 번아웃이 왔다는건 적어도 열심히 해봤다는 뜻이니까, 그만큼 내가 활활 타봤다는 증거기도 하죠. 전혀 한심하지 않고, 멍청하지도 않아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난 왜 이 정도도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 수도 있지만, 내가 힘들었다면 그건 힘든 일이 맞아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까 그건 당연한 거에요. 절대 나의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나 그정도의 열정을 부어버리고 스트레스를 받아버린다면 못버티고 망가지죠.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난 그저 노력했고, 멋있었고, 이제 쉴 때가 됐다는 걸 알기만 하면 되요.
사람들은, 특히 이런 사회에서 살아온 여자들은 남들에게 나쁜 말은 하기 어려워 하면서 나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나쁜 말을 하며 비하하죠. 모든 이상한 상황에 대한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 내가 다 잘못한거라 사과해야하고, 잘난척은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이며, 나를 향한 칭찬은 오글거리고 민망해서 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죠. 나도 그랬고, 우리 엄마도 그랬고, 내 주변 여자 친구들도 다 그랬어요. 정도는 다르더라도 대부분이 저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거에요.
우린 그걸 바꿔야 해요. 그래야 벗어날 수 있어요.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예뻐해주고 사랑해주고 자랑해야하는 건 내 자신이죠. 적어도 남들에게 예의차리고 칭찬하는 만큼, 나를 칭찬하는 시간도 정말 필요해요. 장하다고, 수고했다고 우쭈쭈해주기도 하고, 내 편을 들면서 ‘넌 잘못 없어! 그 사람이 이상했네’라고 말해줄 사람이 되어야 해요.
자신을 칭찬하고 편을 들어줄 때 중요한 건, 그 안좋았던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럼 단순한 뒷담화가 되고, 화를 내느라 에너지를 다 뺏겨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상황과 감정을 떠올려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어요. 잡음이 나는 채널을 틀면 아무리 좋은 노래가 나오고 예쁜 화면이 나와도 불편하고 신경쓰이기 마련이죠. 그럴땐 얼른 깔끔한 채널을 찾아 바꿔버리고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하도록 해야 해요.
자신을 예뻐해주면서 나쁜일 보다는 좋은 일에 집중하기. 이것만 잘해도 정말 많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잘못은 없어요. 그리고 당신 혼자 이 어려움들을 이겨내야 하는 이유도 없죠. 그저 당신 스스로를 칭찬하고 응원하면서 멋지게 빛나기를 바라죠. 우리 여자들은 그 상처들을 알고 있어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죠. 그러니 힘든게 있다면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해줘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번아웃에 대처하는 건 사실 특별한 대처 방법이 없죠. 내가 많이 예민하다는 걸 인정하고 번아웃과 함께 따라오는 우울, 불안, 스트레스를 이겨내려고 무리하지 않고 평생 함께 해야하는 또 다른 동반자라고 생각하니 조금 나아졌어요. 이것을 잘 관리해서 내 자신이 부정적인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게 할 뿐이죠.
요리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어요. 뭔가 거창한게 아니라 sns에 핫한 인스턴트 조합음식이라도 좋아요. 재료를 사러 마트, 편의점에 가고,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 만드는 과정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생각은 사라져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 자신을 다독이죠.
얼마전 sns에서 유명했던 순두부 라면을 해먹었어요. 살짝 매운 라면에 순두부를 넣는 건데, 두부를 넣으니 뭔가 건강한 느낌도 나고 숟가락으로 순두부를 건져먹으면 말랑한 식감에 매운맛도 중화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기본 베이스는 매운 라면이라 먹다보면 살짝 땀이 났고 다 먹고 샤워하고 나오니 개운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 뿐만 아니라 직장 내 성차별, 차별, 일에 대한 회의감, 가족관계로 인해 번아웃, 우울,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포기 하지 말고 함께 하자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늦어도 괜찮다고.
억지로 나에게 스트레스 주는 것들과 가까이 있을 필요는 없어요. 가족과도 친구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만의,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게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유리천장을 뚫는 것도, 성평등한 조직을 만드는 것도 혼자서는 힘겹기 마련이죠.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구와 함께라면 우린 더 잘 버티고, 이겨내며 우리의 공간을 넓히고,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더 많이 연대하고 더 많이 지지하며 함께 하길 바랍니다. 저도 그러할 것이고, 다른 분들도 그리하다보면 서로를 알아보고 가슴 따뜻해지는 날이 올것입니다.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거예요. 저도 그러니까요. 그러나 함께 연대하는 여성들이 있어 소속감을 느껴요. 누군가 저를 보고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간다고 해요. 한 고개 한 고개 넘다 보면, 우리에게도 봄은 올 거예요!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오래오래 봤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성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만약 너무 힘이 들 때가 있다면 눈과 귀를 조금 닫기도 하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이걸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내보이기도 하면서요.
여성신문이 2021년 신년 기획 <92년생 김지영>을 통해 이 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싣습니다. 82년생, 92년생, 00년생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젠더갈등'이라는 이름 아래 그동안 '한국형 백래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주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가 노력해야 할 방안 등을 살펴보려 합니다.
※ 본 인터랙티브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